KO/바가바드 기따 있는 그대로 9.34

Revision as of 11:37, 30 July 2020 by Navakishora Mukunda (talk | contribs) (Bhagavad-gita Compile Form edit)
(diff) ← Older revision | Latest revision (diff) | Newer revision → (diff)
His Divine Grace A.C. Bhaktivedanta Swami Prabhupāda


제34절

만-마나 바바 맏-박또 man-manā bhava mad-bhakto
맏-야지 맘 나마스꾸루 mad-yājī māṁ namaskuru
맘 에바이샤시 육뜨바이밤 mām evaiṣyasi yuktvaivam
아뜨마남 맛-빠라야나하 ātmānaṁ mat-parāyaṇaḥ

동의어

맛-마나하: 항상 나를 생각하는, 바바: 되다, 맛: 나의, 박따하: 헌애자, 맛: 나의, 야지: 숭배자, 맘: 나에게, 나마스꾸루: 절을 올리다, 맘: 나에게, 에바: 완전히, 에샤시: 너는 올 것이다, 육뜨바: 몰두하는, 에밤: 따라서, 아뜨마남: 네 영혼, 맛-빠라야나하: 나에게 봉헌하는.

번역

네 마음을 항상 나를 생각하는 데 두고, 나의 헌애자가 되어 나에게 절하며 나를 숭배하여라. 나에게 완전히 전념하면 너는 나에게로 반드시 올 것이다.

주석

이 구절에서 끄리쉬나 의식이 이 오염된 물질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분명히 가리킨다. 가끔 파렴치한 주석가들은 여기에서 명확히 언급된, 모든 봉헌은 최고인격신, 끄리쉬나께 바쳐야 한다는 의미를 왜곡한다. 불행히도, 파렴치한 주석가들은 독자의 마음을 실현 불가능한 데로 돌린다. 그러한 주석가들은 끄리쉬나의 마음과 끄리쉬나와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모른다. 끄리쉬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당신은 절대 진리이다. 당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당신 자신은 하나이고 절대적이다. 이것은 꾸르마 뿌라나에 명시되어 있고, 박띠싯단따 사라스바띠 고스와미께서 짜이따냐 짜리땀리따(제5장, 아디 릴라 41~48절)에 대한 주석으로 아누바샤(Anubhāṣya)에 인용하셨다. “데하-데히-비베도얌 네스바레 비댜떼 끄바찟(deha-dehi-vibhedo ’yaṁ neśvare vidyate kvacit).” 이 말은 끄리쉬나, 지고한 주 당신 자신과 당신의 몸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석가들은 이 끄리쉬나의 과학을 몰라서 끄리쉬나를 숨기고 그의 인성을 그의 마음과 몸에서 분리한다. 이것은 끄리쉬나의 과학에 관한 완전한 무지임에도 몇몇은 사람들을 이렇게 오도함으로써 이윤을 챙긴다.

끄리쉬나를 생각하긴 하지만 끄리쉬나의 삼촌, 깜사 왕처럼 끄리쉬나를 시기하는 악마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끄리쉬나를 항상 생각하지만 끄리쉬나를 적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끄리쉬나께서 언제 자기를 죽일까 하는 생각에 항상 불안해한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헌신적 사랑으로 끄리쉬나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박띠라고 한다. 우리는 끄리쉬나에 관한 지식을 끊임없이 배양해야 한다. 우리에게 유익한 이 배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진정한 스승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끄리쉬나는 최고인격신이며, 이미 여러 번 설명했듯이 당신의 몸은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원하며 행복한 지식이다. 끄리쉬나에 관한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우리가 헌애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된다. 잘못된 출처를 통해 끄리쉬나를 다르게 이해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끄리쉬나의 영원한 형상, 원초적 형상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끄리쉬나가 절대자라는 확신을 마음에 가지고 숭배해야 한다. 인도에는 끄리쉬나의 숭배를 위한 수천수만의 사원이 있고 그곳에서 봉헌이 실천되고 있다. 그러한 실천이 있을 때 우리는 끄리쉬나께 절해야 한다. 신상 앞에서는 자신의 머리를 숙여야 하고 자기 마음과 몸, 행위, 모든 것을 봉헌에 종사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벗어나지 않고 전적으로 끄리쉬나께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끄리쉬나로까로 옮겨가게 도울 것이다. 우리는 파렴치한 주석가들에게 오도되어서는 안 된다. 끄리쉬나에 관한 듣기와 구송을 시작으로, 아홉 가지 봉헌의 과정에 임해야 한다. 순수한 봉헌은 인간 사회의 가장 높은 성취이다.

바가바드 기따의 제7장과 제8장에서 추론적인 지식과 신비적 요가, 결실적 행위에서 벗어난, 주를 향한 순수한 봉헌을 설명했다. 순수하게 정화되지 않은 자들은 비인성적 브라흐마죠띠나 국부적 빠람아뜨마와 같은 주의 다른 특징들에 사로잡힐 수 있지만, 순수한 헌애자는 직접적으로 지고한 주께 봉사한다.

끄리쉬나에 관한 아름다운 시가 있는데, 거기에서 데바 숭배에 종사하는 누구라도 가장 어리석고, 끄리쉬나라는 최고의 상을 결코 얻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시작할 때 헌애자가 간혹 표준에서 떨어질 수 있지만 그래도 그는 다른 철학자나 요기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의 우발적인, 비헌애자 같은 행위는 줄어들 것이고, 곧 의심의 여지 없이 완성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순수한 헌애자는 사실 타락할 위험이 전혀 없는데, 그 이유는 최고인격신께서 개인적으로 당신의 순수한 헌애자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성 있는 자는 끄리쉬나 의식의 과정에 직접 착수해 이 물질계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결국 끄리쉬나라는 최고의 상을 받을 것이다.

이로써 스리마드 바가바드 기따의 제9장, 가장 비밀스러운 지식에 대한 박띠베단따 주석을 마칩니다.